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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다 때가 있다!

 전에는 저의 두 팔을 뒤에서 맞잡을 수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때밀이 수건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중에서 팔고 있는 손바닥만 한 일명 ‘이태리타월’은 등을 밀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로 수건으로 등을 밀었습니다만 지금은 머플러처럼 나온 이태리타월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길을 가다가 ‘다 때가 있다’는 목욕탕의 광고문을 보았습니다. 광고문의 ‘때’라는 말에는‘ 몸의 때’라는 의미도 있지만 ‘기회’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저는 이 광고문은 모든 사람에게는 몸의 때가 있고 기회도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재치 있는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때’ 하면 저는 때밀이 수건과 목욕탕이 떠오릅니다. 제가 목욕탕에 가면 먼저 반달 모양의 유리문이 보이고, 돈을 내면 입장표를 내줍니다. 저는 ‘맡기지 않는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주인 백’ 이라는 안내문을 갈 때마다 보았습니다.       제가 어린 때는 이 말을 읽을 수는 있었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보니, 커서 보게 된 이 안내 글처럼 맡기지 않는 귀중한 내 생명은 하나님도 책임지지 않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몸의 때를 밀기 위해 목욕탕에 가는 것처럼 영혼의 때를 밀기 위해 교회에 오라고 전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들 교회’는 ‘회개는 영혼의 때를 벗깁니다!’라는 복음광고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서 가장 큰 차이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시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이루어지는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인간을 비웃으며 하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불행이 닥쳤다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그 불행이 권리의 침해로 느껴질 때 분노한단다.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을 느닷없이 빼앗겨 버리는 것만큼 화내기 쉬운 상황은 없지. 한적한 저녁 시간을 보내길 고대했는데 뜻하지 않는 사람이 불쑥 찾아오거나 하면 인간은 화를 쉽게 내지. 왜? 자기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 것인데 억울하게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는 열심을 다해 인간이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 생각하도록 하려무나.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시간은 그들의 것이 아니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그들은 그걸 몰라. 만약 시간이 인간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저희 소지품이게. 인간이 시간을 자기를 만든 이의 뜻에 따라 써야 할 처지라는 걸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악마들이 할 일이지.”       저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신앙인 입장에서 시간의 주인인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고 또한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찬송가 523장 또는 통합찬송가 262장의 “어둔 죄악 길에서” 후렴에 보면, “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 받을 때가 이때라” 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짧은 가사에 ‘때’가 4번이나 나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는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2번이나 ‘때’가 나옵니다. 솔로몬이 노년에 썼다는 전도서 3장에도 ‘모든 기한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예수님도 30년의 ‘때가 차매’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때가 찼을 때 부르셨고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저는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고, 기회가 왔을 때 주님께 맡기는 결단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칼럼 / 에콰도르 임동섭 선교사에콰도르 임동섭 때밀이 수건과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 나라

2024-03-15

[시로 읽는 삶] 숨비소리

그림자를 다시 돌려놓으며// 광장은// 좋은 오후가 뭔지 알아// 이파리/ 떠가는// 새 날아간 만큼 번지는 하늘// 나무가 더 자라도 될까/ 둘러보는 동안// 모든 어깨를 찾으려고 부는 바람// 누군가는 누군가의 젊음으로 서 있고   -유이우 시인의 ‘숨’ 부분       신록은 우거지고 하늘은 맑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새들은 지저귄다. 작약은 피어 함박웃음을 짓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해지는 오월이 아름답다. 눈부시게 황홀한 날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될까. 계절과 날씨는 물론이거니와 삶이 기대치에 다다라 흡족한 날은 그리 많지는 않다.     바람도 나무도 긴장을 풀고 평화롭기만 한 주말 오후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쉬어본다. ‘숨’이라고 말해보기도 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숨을 쉰다. 숨이란 살아있다는 증거, 견뎌온 자가 누리는 호흡이고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라고 성경은 말한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맨 처음 하신 일이 숨을 주신 것이다. 숨이란 하나님의 절대 권한이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이야말로 누구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숨을 쉴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의 축복임은 자명하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격려와 감사가 절로 나온다. 아흔다섯 해 봄을 맞고 계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몇 달 사이 뛰기도 하는 손자에게 감사하다. 어김없이 피어나는 앞뜰의 패랭이꽃도 대견하고 끝도 없이 손길을 요구하는 잡초들도 그리 밉지 않다.   느낌만으로 살아지는 건 아니다. 생활의 조건들인 물적 필요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필요들의 여하에 따라 우리는 행복해하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낌이라는 섬세하고 여린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크게 작용하는 때도 있다. 숨이라는 말 앞에, 숨이라는 명제 앞에 서 있을 때, 살아 있음이 느낌이 되어 전율하게 되곤 한다.     해녀들이 잠수를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서 내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숨을 고를 때 내는 소리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산소를 들이마시기 위한 생존의 소리라고도 한다.     숨은 쉬기도 해야 하지만 고르기도 해야 한다. 숨을 고르는 일은 나아갈 방향을 놓고 고민할 때나 장애물을 건너야 할 때 힘의 안배를 의미한다. 충분한 숨 고르기로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기록을 경신하기도 한다. 삶이 파도처럼 흔들릴 때, 좌초하지 않으려면 평형을 유지해야 하듯 숨 고르기를 통해 평정심을 얻기도 한다.     ‘숨을 거두다’라는 말은 ‘죽음’의 다른 말이다. 숨이라는 말은 이렇게 서늘함을 거느리고도 있다. 숨이야말로 생명의 마지노선이다. 들숨과 날숨의 짧은 요동 사이로 존재와 부재가 엇갈리는 순간을 맞곤 한다.       오월이 눈 시리게 환하지만 뒤편엔 그늘이 있을 것이다. 생활에서 오는 피로감은 우리의 느낌을 망쳐놓기 일쑤다. 초록에 취해 얼큰해진 기분조차 긁어놓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숨을 쉴 수 있어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심호흡하고 숨을 고르기도 하는 봄의 막바지, 초록에 편승해 한껏 푸르러지는 마음만으로 족하다. 살아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바라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이 벅차오르는 이 느낌이 좋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숨비소리 여호와 하나님 숨이란 하나님 막바지 초록

2022-05-24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예수클럽

삶이 어려워지면 신앙인들은 흔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반문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질병이나 실직, 실패의 고통 가운데 있게 될 때나 불의를 경험할 때, 또 무종교의 사람들이 윤택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을 볼 때도 막연한 회의에 빠진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삶 가운데서 겪는 고난이나 고통, 실의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신실한 신앙생활이 부와 권력, 명예나 건강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꿈꾸는 집이나 이상적인 배우자나 바람직한 자녀나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어떤 행로로 이어지는 인생길이건 설사 폭풍 속을 헤치고 가는 길이라 해도 함께 동행하시다가 다음 세상에 갈 때 있을 곳을 마련해주신다는 내용이다. 다음세상에서 홈리스 될 일은 없다는 한가지 보장 뿐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음에도 왜 어떤 연유로 대다수의 교인들 그리고 교인을 판단하는 세상 사람들은 근거 없는 오해 가운데서 수시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타박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아직 그의 어머니의 태내에 착상되기 전부터 그를 알았고,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하시면서 예레미야에게 평생의 사명을 주셨다.     성경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삶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살해 위협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스스로 죽기를 자청할만큼 험한 역경 속에 있던 예레미야에게 성공적인 사역이나 평탄한 앞날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와 함께 해주신다는 내용 한가지였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뿐이다.     예레미야의 예가 증명하듯이 신앙인은 사기가 저하될 때 함께 해주시고 고난을 이기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고난을 피하거나 면제시켜 주시는 분이 아님도 분명하게 기억할 일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이 땅에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예는 수없이 많다.     쌍동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을 봐도, 선택 받지 못한 에서는 인생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안락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던 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챈 행적 태문에 야반도주를 하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야곱의 인생은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들을 견뎌내고 수많은 해를 낯선 땅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살아낸 행로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적인 개념인 개인의 행복과 성공의 가치관을 기준한 게 아니고, 궁극적인 영혼의 처소 및 몇 세대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을 지닌다. 예레미야는 비록 하나님을 의심하고, 마음이 상하고, 갈등해야 했지만 “주님이 환난날에 나의 힘이요 요새요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하며 신실함을 지켰다.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하고 끝내 소유하는 집요함을 보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삶 가운데 계신 것을 고백하는 생을 살았다.     밤이슬을 맞으며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한 야곱은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보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두려워하며 그 자리를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전이라고 명했다. 이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일용할 양식과 입을 옷을 주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주신 축복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예수는 요한복음1장에서 야곱이 본 환상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야곱이 본 사다리 대신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인자라는 단어로 바꾸고 사람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사다리의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르치셨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수용하고, 문제에 대한 해답 대신, 하나님의 존재를 구하고,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직 멤버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클럽이다”고 했다. 근거 없는 오해일 랑 떨쳐내고 더 늦기 전에 예수 클럽에 가입하기를 권한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예수클럽 여호와 하나님 반면 하나님 예수 클럽

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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